| 2005-09-07, 10:44 AM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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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루이 가세에 대하여
Jean Louis Gassée
Posted by: Tom on Jul 26, 2005 - 11:09 AM People 쟝 루이 가세는 50년대에 프랑스 오르세에 있는 기술 대학을 졸업하였고, 파리의 휴렛팩커드에서 컴퓨터 관련 직장을 시작하였다. 애플이 막 주식 시장에 상장될무렵, 애플의 첫 번째 해외 지사인 애플 프랑스를 설립하기 위해 가세가 영입되었고, 가세는 애플 프랑스를 애플 내에서 제일 이윤을 많이 내는 자회사로 빠르게 만들어냈다. 1986년에는 애플에서 큰 변동이 일어난 해였다. 스티브 잡스와 1978년부터 모든 애플 광고를 맡아왔던 PR 회사, Chiatt Day가 축출되었던 것이다. 존 스컬리(John Sculley)는 개인적으로 가세를 끌어들여서 애플 마케팅부를 이끌게 하였다. 가세가 애플에 들어온 지 이 주일 후, 맥 플러스가 출시된다. 가세는 맥 플러스 디자인에 별 관계가 없었으나, 맥 플러스는 잡스가 1984년 선보였던 정보기기 개념보다 가세의 비전에 거의 접근한 컴퓨터였다. 그는 맥을 사용자 세계의 중심이자, 다른 디바이스와 서로 연관되는 수단, 정보의 집합체로 보았다. 그 해 후반, 스컬리는 가세를 제품 개발부에도 영입하게 되고, 그는 자신의 매킨토시 비전을 실현시키기 시작한다. 가세는 애플이 폐쇄형 디자인으로는 생존할 수 없으리라 우려하여, 매킨토시 클론 허용을 제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신 그는 매킨토시 자체가 개방형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새로운' 맥이 나오기 이전, 맥에서의 확장성이란 시리얼포트나 SCSI로만 가능했었다. 모험적인 회사들이 실질적으로 맥의 ROM칩을 새로운 칩으로 교체시키는 등 주변기기를 만들기는 하였지만, 가세의 비전에 들어맞는 예는 아니었다. 그는 확장슬롯이 모든 전문용 맥에 있어야 한다 주장하였다. 우월한 플랫폼에 우월한 소프트웨어, 그는 애플이 앞으로도 이 우월성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68020 맥(매킨토시 II)을 위해, 그는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로부터 누버스(NuBus)를 라이센스하였다. 업계 버스 표준으로서, 이제 써드 파티 개발자들은 맥용 제품 개발에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누버스는 당시 기술적으로 PC에서 쓰이는 ISA 버스에 비해 우월하였다. 누버스는 플러그앤플레이를 허용하였으며, 개발자들은 각 카드별로 자원을 수동-파티셔닝할 필요가 없었으며, 운영체제가 모두 처리해주었다. 비록 애플과 넥스트(NeXT)만의 표준이었지만, 누버스는 90년대 중반까지 맥에 주요 확장 수단을 제공하였다. 매킨토시 II는 그래픽 아티스트들에게 특히 대 히트작이었다. 맥 플러스의 한계가 더이상 없었으며, 컬러 디스플레이도 이제는 한 옵션이었기 때문에 그 외 모든 것을 개발자들이 시도해볼 수 있었다. 누버스 표준에 대해 개발을 시작한 활발한 커뮤니티도 생겨났다. 애플 또한 그러했다. 맥용 고급 그래픽을 제공하는 회사인 Radius가 이때 애플로부터 분사된다. 중간급 맥인 SE도 확장 슬롯을 포함하게 되는데, 맥 II 판매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해, 가세와 그의 팀은 SE에 독점적인 인터페이스, PDS 슬롯을 장착한다. 가세는 맥의 이미지를 계속 형성시켜 나아갔다. 그는 Blue와 Pink 프로젝트의 창립자이기도 하였다. 1989년, 그는 존 스컬리에게 맥이 사용의 편리성에 있어 우위를 지킬 수 있을테지만, OS/2라는 거인이 애플의 하이엔드 시장을 잠식할 것 같다고 보고하였고, 스컬리도 이에 동의하였다. 이에 애플 엔지니어링부는 전통적인 맥 오에스의 차세대 버전(당 기능들이 적힌 카드에 따라 블루라고 불리었다)에 원하는 모든 기능을 결정하게 된다. 엔지니어리부가 원하는 모든 기능들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애플은 맥 오에스를 브랜드화시켰고, 핑크 또한 야심찬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차세대 맥 오에스 최대의 기능 두 가지는 선점형 멀티태스킹과 하드웨어의 신비화였다. 애플은 RISC 아키텍쳐로의 이주와 함께 CISC 68K 프로세서로부터 떠나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둘 모두에서 돌아가는 운영체제를 필요로했다. 불행히도 OS/2(그리고 나중에는 윈도우즈 NT)에 대한 애플의 답변(차세대 애플 RISC 프로젝트인 재규어에서 돌아갈 운영체제)은 몇 년이 지나도록 나오지 못하였다. 블루는 시스템 7로 통합되었고, 시스템 7은 가상 메모리와 32비트 메모리 어드레싱, 통합된 멀티태스킹과 새로운 시스템 폴더 레이아웃을 포함하였다. 예전 버전의 맥 오에스는 새 매킨토시 하드웨어로부터 장점을 완전히 활용하지 못하였다. 예전 버전의 맥 오에스는 8MB의 RAM 이상을 어드레싱하지 못하였다. 새 맥 오에스는 32비트 메모리 어드레싱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기가 바이트급 RAM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전에는 미니 컴퓨터 운영체제에서만 발견할 수 있었던 기능인 가상 메모리도 새 맥에 탑재된 하드 드라이브 공간(이전 맥 128K에는 400KB의 플로피 드라이브만 있었다) 활용을 위해 덧붙여졌다. 그런데 시스템 7이 나오던 해, 윈도우즈 3.0이 나오고, 가세는 윈도우즈에 대해 우려하였다. 윈도우즈는 곧 윈도우즈 95가 나오기 전에 베스트 셀러 소프트웨어 패키지가 되었다. 윈도우즈와 OS/2에 대한 맥의 우월성이라는 가세의 비전이 손상된 것이다. 비록 윈도우즈 3.0이 맥 오에스의 편리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이전보다 많이 근접한 것 또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하드웨어 제조업체들은 새 컴퓨터에 윈도우즈를 번들하기 시작했고, 애플은 점차 틈새 시장으로 밀려나는 듯 해 보였다. 그 해 말(애플의 주가는 20% 떨어진다), 스컬리와 가세는 모두 축출된다. 그때의 컴퓨터 방식에 만족하지 못했던 가세는 멀티미디어 운영체제를 만들기 위해 새 회사를 고려하였다. 그는 "긱들을 위한 운영체제"를 만들기 원하였다. 비효율적인 운영체제가 애플 하드웨어의 완전한 멀티미디어 기능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멀티미디어 유통과 저작에 특화된 완전히 새로운 플랫폼을 만들고 싶어하였다. 처음에는 코모도어의 아미가(AMIGA)가 물망에 올랐다. 80년대 후반 상당한 찬사와 함께 출하한 아미가는 스스로를 멀티미디어 플랫폼으로 규정지었었다. 그러나 맥과 같은 68K 프로세서를 탑재했으면서도 완전한 멀티태스킹 운영체제를 갖고 있던 아미가는 미국 시장에서 실패하였다. 브랜드에 민감한 소비자들이 코모도어라는 소기업에서 나오는 컴퓨터 구입에 주저했기 때문이다. 코모도어는 당시 가정용 게임 머신인 코모도어 64로나 알려져 있던 회사였다. 가세는 1988년, 코모도어로부터 아미가 인수를 고려하였지만, 코모도어가 제시한 가격때문에 인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가세가 애플을 떠난 직후, 코모도어 사장이 그에게 접근하여 코모도어의 연구개발부를 이끌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는데, 가세는 이전 애플에서의 일을 다시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허덕이는 기업을 되살릴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어하였다. 20 개월동안 그는 회사를 맡기 원하였는데, 성공을 하면 지위를 유지할테고, 성공 못한다면 아무 것도 보상을 받지 않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코모도어는 이를 거부하였고, 가세는 다시 회사를 찾아보았다. 여러 운영체제를 알아본 끝에, 가세는 자신의 구미와 값에 딱 들어맞는 곳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애플의 뉴튼 프로젝트 리더였던 스티브 사코만(Steve Sakoman)을 불러들여서 전자 제품 소매상인 Fry로부터 부품을 얻어다가 프로토타입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사코만은 AT&T Hobbit 프로세서에 기반을 둔 마더보드를 제작하였다. 이 프로세서는 뉴튼이 사용할 예정으로 있던 프로세서였다. 더해서 이 컴퓨터는 두 개의 디지탈 시그널 프로세서(DSP)를 포함할 것이었다. DSP의 기능은 FPU의 기능과 유사하다. DSP는 비디오와 사운드 프로세싱에 필요로하는 복잡한 수학 연산 속도를 늘린다. FPU와 마찬가지의 연산이다. 스티브 사코만이 마더보드를 조립한 후, 가세는 회사를 하나 세워서 새로운 운영체제와 하드웨어 판매를 결정한다. 사코만은 이 회사가 Be가 되어야 한다 주장했고,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애플과의 예전 계약을 이용하여 가세는 예전의 재규어 엔지니어 세 사람을 불러들여서 새 머신(BeBox)용 운영체제 개발을 돕도록 한다. 이 운영체제의 이름은 BeOS였다. BeOS는 시작부터 혁신적이었다. 마이크로커널 디자인(넥스트스텝의 후반 버전과 비슷하다)에 멀티미디어 제작을 쉽게 해 주는 개별 서버를 갖추었다. 모노리딕 커널에 드라이버와 유틸리티를 집어 넣는 대신, 각 기능이 각자의 서버를 통해 해결하도록 되어 있는데, 개별 서버가 충돌을 일으킬 경우에는 전체 시스템을 재시동하지 않더라도 쉽게 재시작할 수 있다. Be의 마이크로커널 디자인은 애플리케이션간 정보의 교환도 매우 쉽게 만들었으며, 추가적인 서버가 없다 하더라도 부팅 가능한 운영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당시 애플은 뉴튼용으로서 Hobbit 프로세서(CISC)를 포기하고, 애플이 큰 지분을 소유한 Advanced RISC Machines으로 이주하였다. 대기업 고객이 없자, AT&T는 이윤이 남지 않는 Hobbit 프로세서 생산을 중단하였고, 이때문에 Be는 프로세서를 잃게 되었다. Be에 고용된 옛 재규어 팀원들은 RISC 프로세서의 사용을 원하였다. 사실 재규어가 사용할 프로세서는 모토로라 88K였지만 가세는 88K 또한 Hobbit과 같은 운명을 갖게 될지 걱정스러웠다. 88K를 구매할 대기업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토로라는 IBM과 함께 애플의 새 컴퓨터 라인에서 사용하게 될 별다른 프로세서를 개발중이었는데, 이 프로세서는 PowerPC라 불리었으며, 대기업 고객들도 충분했다. (1999년 당시 모든 GM 자동차와 시스코 라우터에는 PowerPC가 탑재되어 있었다.) BeOS도 곧 이 새로운 프로세서로 포팅이 되었다. 마이크로커널 디자인 사용에 있어서의 장점은 시스템 자체의 융통성이었다. 포팅에는 새로운 마이크로커널과 다른 서버용으로서 몇 가지 부분의 수정만 하면 되었다. 1994년 Be는 PowerPC 아키텍쳐에서 돌아가는 베타 운영체제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최신예 PowerPC 603 프로세서를 사용하는 PowerPC 웍스테이션 중에 저렴한 웍스테이션이 없었다. 따라서 Be는 또다른 BeBox를 만들 수 밖에 없었다. 이 BeBox는 66MHz로 돌아가는 PowerPC 603 프로세서 두 개와 DSP 두 개를 탑재하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소비자용 데스크톱 시스템의 클럭 주파수는 40 MHz보다 훨씬 아래였다.) 새로운 BeBox는 넥스트와 썬, 실리콘그래픽스에서 나온 보급형 웍스테이션을 모두 능가했다. GeekOS라고도 불렸던 새 운영체제는 1995년, 엑스포에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가세는 이 혁신적인 운영체제를 여러 중역들에게 선보이기 주저했다. 그는 BeOS가 저평가받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는 BeOS를 기업 중역들보다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들과 그 외 팬들에게 선보이기 원하였다. 하지만 자금이 점점 부족해지는 가운데에 그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Be에 대한 그의 초기 투자 자금은 거의 다 사라졌었고, 운영체제의 완성을 위해서는 벤쳐 자본가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BeOS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강력했으며, BeOS의 속도와 기능을 보여주는 특별한 데모 프로그램도 꽤 있었다. 어떤 데모는 16 개의 비디오 스트림을 프레임 저하 없이 동시에 돌리기도 하였다. 당시는 대부분의 개인용 컴퓨터들이 특별한 디코더가 없는 상황에서 MPEG 비디오를 재생시킬 수 없던 시절이었다. 또한 강력한 3D 기능을 보여주는 데모도 있었다. 날아다니고 춤을 추는 Be 로고는 거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보였다. 한 번에 다중 instance를 불러들일 수 있었으며, 운영체제는 부하를 각 프로세서에 고르게 분배하였다. 엑스포 참가자들은 모두 새 운영체제에 감동을 받았으며, 가세는 투자자들을 쉽게 모을 수 있었다. 1996년, 애플은 603 프로세서를 탑재한 파워맥 라인을 출하한다. 초기 세 명의 개발자 중에 하나인 브누아 실링스(Benoit Schillings)는 BeOS를 표준 파워맥에서도 돌아가게 포팅시켜서 거대한 매킨토시 시장을 잠식해야 한다 주장하였다. Be는 1996년 애플 WWDC에 참가할 예정이었고, 실링스는 그때까지 맥 상에서 돌아가는 BeOS를 보여줄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당시 애플은 Be에 대해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Be는 클론 업체인 Power Computing과 계약을 맺어서, PowerCenter 132에 탑재될 수 있었다. 당시 PowerCenter 132는 애플 맥을 포함해서 제일 빠른 맥-호환 컴퓨터였다. 다행히도 파워매킨토시와 비박스는 모두 상당히 닮은 기종이었다. 같은 IBM 마더보드 디자인에서 파생됐기 때문이다. 6 주일 뒤, Be는 많은 기능이 아직은 누락 상태였지만 WWDC에서 PowerCenter에서 돌아가는 BeOS를 준비하였다. BeOS는 플로피 디스크와 출력을 사용할 수 없었고, 인터넷에는 PPP를 통해서 접속하였지만 버그가 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e의 출현은 큰 히트였다. 모든 컴퓨터 잡지들이 Be를 다루었고, 여러 클론 업체들이 BeOS 탑재 계약을 하였다. WWDC 기간동안 애플은 개발자 버전의 코플랜드를 데모하였었다. 1996년에 나올 예정으로 되어 있었지만, 애플 내부 관측통들은 코플랜드가 과연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애플은 앞으로 나오게 될 소비자용 버전의 윈도우즈 NT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운영체제를 사들이거나 라이센스해야할 형편이었다. 당시 애플 경영진은 다른 운영체제를 라이센스 하는 편이 값이 덜 먹히리라 생각하였다. 처음에 애플은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와 접촉하여 솔라리스를 수정해서 사용할 수 있는지 문의하였다. 하지만 가격이 너무 높았고, 애플은 다른 곳을 알아보았다. AIX와 OS/2, 심지어는 윈도우즈 NT까지 알아보았지만 애플의 탐색은 별 소득이 없었다. 이에 애플은 새 운영체제를 사들여야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언론의 초점은 Be에 맞춰져 있었다. BeOS는 이미 파워매킨토시에 포팅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인터페이스도 맥과 엇비슷했다. 두 회사는 1996년 6월, 인수 협상에 들어간다. 애플 CEO, 아멜리오(Gil Amelio)와 가세는 가격을 두고 협상을 벌였는데, 가세의 최종 제안 액수는 2억 5천만 달러였다. Be의 가치보다 2억 달러가 더 높았었다. 아멜리오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넥스트를 인수하여 오픈스텝을 사용하기로 결정내린다. 가세는 상당히 실망했지만 곧 Be를 다시 전진시킨다. 애플에 Be를 팔 수 없게 되자, Be는 X86 플랫폼으로 관심을 돌린다. 소프트웨어팀은 BeOS를 펜티엄으로 포팅시키는데, 운영체제의 교체가 아닌, 부가적인 운영체제를 제공할 것이었다. 가세는 윈도우즈와 오피스에 대해 경쟁을 벌일 필요가 없다고 판단내렸다. 대신 Be는 BeOS가 부가적인 운영체제라 마케팅하였다. 일상적인 오피스 작업에는 윈도우즈를 사용하면서 멀티미디어에는 BeOS를 사용하게 하는 식이었다. 이 접근은 실패하였다. Be의 노력은 한 번 더 주목을 받게 되는데, 애플에서 가세가 가졌던 개방형에 대한 비젼과는 완전히 다는, 인터넷 기기때문이었다. BeIA라 불린 이 기기는 PowerPC와 Opera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소니 외에 이 제품용 벤더를 찾을 수가 없었다. 불행히도 인터넷 기기에 대한 열기는 시들어버렸고, 결국 소니도 모든 BeIA 고객들에게 리펀드를 해 줄 수 밖에 없었다. 자본은 빠르게 잠식당해갔고 Be는 문제에 휩싸였다. 가세는 Be를 인수해 줄 회사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Be는 PC 제조업체들의 BeOS 번들을 방해한 혐의로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소하였다. 수 천만 달러를 들인 끝에 결국 Be가 승리하기는 하였지만 너무 늦었으며, Be는 자산을 애플이 제시했던 값보다 훨씬 헐값으로 Palm에 넘겼다. 가세는 이미 Palm의 이사진이었으며, 새 Palm OS 전략이 BeOS를 중심으로 하도록 조정하였다. BeOS의 컴퍼넌트들이 Palm의 차세대 운영체제인 코발트(나중에 Palm OS 6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에 사용될 예정이었다. 2003년 8월, Palm은 두 개의 회사로 분리되는데, 제조업체는 PalmOne, Palm OS와 BeOS의 개발자들로 이뤄진 PalmSource이다. 가세는 PalmSource의 사장이 된다. 회사 분리 이후 PalmOne은 운영체제 핵심에 BeOS를 쓰지 않겠노라고 발표하였다. 대신 Palm OS를 돌리기 위해 PalmOne은 중국제 리눅스를 이용하였는데, PalmOne의 발표 이래 어느 회사도 Palm OS 6에 기반을 둔 디바이스를 아직까지 발표하지 않고 있다. (발표 계획조차 아직 없는 실정이다.) http://braeburn.ath.cx/modules.php?o...=article&sid=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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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Q casaubon 님께서 2006-08-21 01:44 AM 에 수정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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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9-07, 02:13 PM |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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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견입니다만... ㅡㅡ;;;
NuBus 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를 포함해서) 누버스라고 불러왔는데요, 근데 곰곰 생각해보니 이것은 그리스어로 mu, nu 할 때의 Nu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Nu 는 '누' 가 아니라 '뉴' 라고 읽는 것이 더 맞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떠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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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VEWY ni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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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9-07, 07:47 PM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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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뉴라고 읽는 게 맞을겁니다... 때로는 Light 대신에 Lite 쓰듯이, New대신에 Nu라고 쓰기도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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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have a dream that my four computers will one day surfing on the internet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kind of their OS but by the standardization of their browser. I have a dream tod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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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9-07, 08:32 PM |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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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OS 윈텔 버전을 잠시 설치해 사용해 본 적이 있습니다. 보다 안정적이고 발전된 OS 9 같다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뿐이었고 BeOS 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죠. 애플리케이션도 별로 없었고요. 멀티 프로세서 지원으로 듀얼 프로세서 사용자 분들이 재미삼아 BeOS를 설치해 사용하기도 하더군요.
지금은 추억 속의 OS가 됐습니다만, OS 9과 OS X을 대신할 수도 있었던 OS 라는 점에서, 그리고 현재의 애플의 성공이 운영체제 덕분이라기 보다 하드웨어와 킬러 애플리케이션 덕이 크다는 점을 생각할 때 ... 애플이 Be를 인수해 활용했더라면...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습니다. fineapple 님께서 2005-09-07 08:38 PM 에 수정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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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09-07, 08:36 PM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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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분이 손 댄 프로젝트 치고 사람들 관심을 끌지 않았던 것도 없지만 결과가 좋았던 것도 없었죠.
팜에서 코발트 개발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걱정(?)이 되더군요. 저는 팜OS 6.0 코발트 꽤 기대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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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1-13, 01:58 AM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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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내용과 상관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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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11-18, 09:53 AM |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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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ow Jean Louis Gassée Changed the Mac's Direction Tom Hormby Jul 26, 2005/small> 쟝 루이 가세는 컴퓨터 업계에서 제일 효율적인 관리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럽 컴퓨터 산업의 최전선에서 HP를 운영했고, 스컬리 시절 애플 새 제품 부서를 관리했으며 Be에서는 CEO도 역임하였다. 가장 최근에 그는 90년대 후반, 3Com으로부터 Palm이 분사될 때 이후로 이사진으로 있었으며, 그 다음 PalmSource의 CEO가 되었다. 쟝 루이 가세는 50년대에 프랑스 오르세에 있는 기술 대학을 졸업하였고, 파리의 휴렛팩커드에서 컴퓨터 관련 직장을 시작하였다.그는 HP의 새 미니컴퓨터 마케팅 라인을 눈여겨 보고는 주요 유럽 시장에서 명성을 얻는데 도움을 준다. 그 명성은 오늘날에도 자자하다. 1981년, 애플은 막 주식 시장에 상장되려 하고 있었다. 애플의 첫 번째 해외 지사인 애플 프랑스를 설립하기 위해 가세가 영입되었고, 그에게는 매우 제한된 예산과 스물 다섯 명의 직원이 주어졌다. 그가 애플 프랑스를 맡았던 4 년 동안, 애플 프랑스는 애플 내에서 제일 이윤을 많이 내는 자회사였다. 이는 당시 애플 CEO인 존 스컬리(John Sculley)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는 중앙 애플 마케팅 부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애플은 스티브 잡스의 퇴사로 어수선했었다. 애플의 오랜 광고 협력사였던 Chiat Day도 가세가 프랑스에서 사용했던 에이전시로 교체되었다. 스컬리는 가세의 능력에 기뻐하고는 그를 애플 내 제품 개발부 리더로 임명하였다. 즉, 어떤 제품이 최종적으로 시장이 나올 것인지, 못나올 것인지가 그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는 매킨토시에 대한 스티브 잡스 식으로 열정에 빠지지 않았었다. 그는 매킨토시에 써드파티 개발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잡스처럼 막는 대신, 모든 매킨토시들이 업그레이드와 확장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Expandable Macs 가세의 새로운 비전이 반영된 첫 번째 제품이 바로 맥 플러스였다. 맥 플러스는 시각적으로 512K와 동일했지만, 확장성은 훨씬 뛰어난 머신이었다. 맥 플러스는 최초로 SCSI를 갖춘 매킨토시였다. SCSI는 모든 맥과 파워북, 1998년 아이맥이 나올 때까지 나온 모든 파워맥에 번들되었던 고속의 인터페이스로서 고속 하드 드라이브나 스캐너, 그 외 SCSI 버스에 연결되는 다른 주변 기기를 연결시켜 주었다. 게다가 맥 플러스는 RAM 업그레이드가 가능했던 첫 번째 맥이었다. 이전 맥들은 실질적으로 사용자들이 메모리 업그레이드를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가세의 업적은 매킨토시 II로 배가가 된다. 1985년에 나온 매킨토시 II 프로젝트는 차세대 매킨토시를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이 매킨토시는 새 프로세서인 모토로라 68020에 기반을 두었으며, 68020은 68000보다 더 많은 RAM을 어드레싱하였고 더 빨랐으며, PMMU의 추가로 인해 가상 메모리 사용이 가능했다. 또한 매킨토시 II의 데스크톱 케이스 또한 확장성이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 새 컴퓨터는 누버스(NuBus)라 불리우는 표준 버스에 기반을 두었다. 누버스는 원래 MIT의 NuMachine 웍스테이션 프로젝트의 일부로 나왔었다. 누버스는 당시 일반 표준이었던 ISA에 비해 매우 진보적이었다. 플러그앤플레이가 가능했고, 프로그래밍도 쉬었으며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또한 32 비트도 예비가 되어 있었다. 누머신은 중단되었지만, 누버스는 1980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가 인수하면서 계속 남게 되었다. 누버스는 후에 넥스트 또한 웍스테이션 라인용으로 채택된다. 전체적으로, 새 머신은 5500 달러였다. 맥 II의 매출은 기대보다 더 좋았고, 전문 시장에 있어서 맥의 매출을 크게 늘렸다. 또한 새 표준을 둘러싸고 꽤 활발한 개발자 커뮤니티도 조성시켰다. 같은 시기에 나온 매킨토시 SE는 개선된 맥 플러스였다. 매킨토시 SE가 가장 다른 점은 폐쇄적인 PDS(processor direct expansion slot)의 채택을 들 수 있다. 또한 더 빠른 SCSI 인터페이스와 키보드/마우스용으로서 ADB를 갖췄고, 내부 하드 드라이브용 공간도 충분했다. 이 새 머신은 3700 달러로서 맥 플러스보다 천 달러가 더 비쌌다. SE와 II가 나온 직후, 가세는 아미가의 제조 업체인 코모도어 사장직을 제안받았다. 아미가는 훌륭한 컴퓨터로 알려져 있었다. 완전한 멀티태스킹 운영체제에 확장도 쉬웠고, 멀티미디어 소프트웨어가 풍부했다. 소비자용 비디오 편집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아미가용 Video Toaster로 처음 등장했었다. 가세는 아미가의 미래와 경영을 확신하지 못해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Macintosh Not-So-Portable 가세의 치세에 성공만 있지는 않았다. 첫 번째 애플 브랜드 노트북은 맥 II와 같은 시기에 개발이 시작됐지만, 맥 포터블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맥 포터블은 본질적으로 SE에 더 빠른 프로세서(16Mhz)를 달았고, 손잡이와 배터리가 있었다. 포터블은 640X480의 고해상도 액시트 매트릭스 흑백 디스플레이를 갖고 있었으며, 통합 포인팅 디바이스인 트랙볼을 포터블로서는 최초로 달았었다. 납산 배터리를 사용하여, 포터블은 100% 충전되어 있을 때 12 시간 사용이 가능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가세는 맥 포터블을 “타협이 없었던 머신”으로 설명하였고, 그의 말은 옳았다. 맥 포터블은 1989년에 나온 수많은 데스크톱 머신들보다 빨랐지만 15 파운드의 무게에 6500 달러의 가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 머신은 실패작이었다. Apple After the Macintosh 다른 애플 직원들처럼, 가세도 매킨토시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영원하지는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여러가지 “미래 애플 찾기”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그중 제일 야망이 넘쳤던 프로젝트가 바로 Pocket Crystal 프로젝트와 뉴튼 프로젝트였다. 아래 사진에 나온 RISC-기반의 컴퓨터(기존 맥 소프트웨어와 하방 호환성이 없었다), 재규어도 염두에 둘만한 프로젝트였다. ![]() Pocket Crystal 프로젝트와 뉴튼 프로젝트 모두 포터블, 인텔리전트 머신의 개발에 맞추어져 있었다. 스티브 사코만(Steve Sakoman)이 시작한 뉴튼 프로젝트는 A4-크기의 타블렛 상에서 손으로 쓴 명령의 인식과 해석 기능을 목표로 하였다. General Magic과 Magic Cap으로 분화되어 나간 Pocket Crystal은 비슷한 디바이스들끼리 네트워킹이 가능하고, TeleScript라 불리우는 기술을 통해 자동으로 정보를 교환하고 업데이트시키는 개인 커뮤니케이터를 만들자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들 머신 모두 존 스컬리의 Knowledge Navigator와 비슷했지만 맥 매출에 악영향을 끼치게 하지 않기 위해 크기나 그 폭이 줄어들었다. 애플 내 다른 엔지니어들과 함께, 가세는 680x0 프로세서 라인의 미래를 별로 믿지 않았다. 앞으로 나올 인텔의 80486과 P5(나중에 펜티엄으로 바뀐다) 칩 모두 68k보다 확실히 빠르리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던 와중이었다. 가세는 애플을 RISC 아키텍쳐로 이주시키기로 결정내렸고, 재규어라는 새로운 RISC-기반(모토로라 88000 프로세서)의 컴퓨터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초기 프로토타입에는 네 개의 프로세서가 달려 있었다. (이들은 매우 저렴했다.) 그리고 이들은 애플과 노벨이 공동 개발한 프로토타입 마이크로커널 운영체제, 핑크(Pink)를 탑재하고 있었다. 88k 프로세서는 68k와 호환성을 갖지 않았다. 기존 맥 소프트웨어와의 호환성이 정말 중요하다고 여겼던 꼬냑(Cognac) 팀은 여러 RISC 프로세서 상에서 예전 매킨토시용 애플리케이션을 돌리기 위한 68k 에뮬레이터를 작성하였다. 비록 파워 매킨토시 라인에 살아남은 기술이 몇 가지 있긴 했지만, 재규어는 결국 취소되었다. Changing Fortune 1985년, 마이크로소프트는 첫 번째 버전의 윈도우즈를 출시했었고, 애플은 이 제품으로부터 거의 아무런 위협을 느끼지 못하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우즈를 계속 다듬었고, 결국 1990년 윈도우즈 3.0이 나왔다. 가세는 윈도우즈의 판매량때문에 매우 놀랐다. 애플 이사진들도 마찬가지였다. 1992년까지 맥 한 대당 4.5 개의 윈도우즈가 팔려나갔다. 애플의 주가는 20% 폭락하였는데, 이는 애플 역사상 두 번째 폭락이었다. 존 스컬리는 사임 의사를 발표하였고, 가세도 재빨리 뒤를 따랐다. 가세는 애플을 떠난 뒤로도 컴퓨터 업계를 완전히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미래에 관심이 있었다. 그가 본 미래는 바로 좀 더 풍부한 멀티미디어 개인 컴퓨터였고, 거기에 한 몫 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돈과 시장 점유율을 잃어가고 있던 코모도어의 아미가(AMIGA)가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코모도어는 거절하였고, 이에 가세는 직접 차세대 컴퓨터를 만들기로 결정내렸다. To Be and Not to Be 그는 애플의 뉴튼 프로젝트 리더였던 스티브 사코만(Steve Sakoman)을 불러들여서 비(Be)를 시작하였다. 이들은 여러가지 상용 운영체제를 알아보았지만, 적당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자 제품 소매상인 Fry로부터 부품을 얻어다가 프로토타입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사코만은 AT&T Hobbit 프로세서에 기반을 둔 마더보드를 제작하였다. 이 프로세서는 뉴튼이 사용할 예정으로 있던 프로세서였다. 뉴튼처럼 비박스의 프로세서는 하나 이상이 될 터였다. 뉴튼에는 두 개였지만 비박스는 네 개였다. 추가적으로 비박스는 여러가지 디지탈 시그널 프로세서(DSP)를 포함할 것이었다. DSP의 기능은 FPU의 기능과 유사하다. DSP는 비디오와 사운드 프로세싱에 필요로하는 복잡한 수학 연산 속도를 늘린다.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지자, 사코만은 이 박스에서 돌아갈 운영체제 작업을 시작하였고, 가세는 프로그래머들 고용에 나섰다. 이리하여 세 명의 엔지니어들이 처음 비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취소된 재규어 프로젝트 출신이었다. 결국 BeOS라 이름붙여진 이 새 운영체제는 비박스 디자인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좀 더 나중에 나온 마흐 버전처럼 BeOS는 마이크로커널 디자인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즉, CPU로 직접 리퀘스트를 전하는 매우 작은 커널이 있고, 다른 모든 일을 다루는 “서버들”이 있다는 의미다. 이는 시스템을 매우 안정적으로 만들어준다. 컴퓨터를 재시동하는 대신, 사용자는 개별 서버를 재시동시키면 되었다. 서로 실시간으로 정보를 교환시키는 프로그램을 짜는 일도 덕분에 간편해졌다. 비오에스는 프로세서 수를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부하를 분배하면서 그 결과 큰 부하가 걸려도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하였다. 비는 이 프로토타입을 개발자와 일부 직원들에게 시연하였고 반응은 대단했다. 그런데 AT&T는 애플이 Hobbit 프로세서를 쓰지 않기로 결정내리고 지원을 철수하면서 개발을 중단하였다. 비는 초기 디자인을 포기하고 새 디자인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다. 예전 재규어 팀원들은 모두 새 PowerPC에 열광적이었다. PowerPC는 88000의 버스 아키텍쳐와 IBM의 POWER 디자인을 결합시킨 프로세서로서 IBM과 애플, 모토로라가 공동개발하였다. 그때문에 이 칩은 Hobbit 칩보다도 저렴했다. 새 하드웨어 프로토타입은 66MHz PowerPC 603 프로세서를 장착하였고, 파워맥이나 당시 펜티엄 PC보다 훨씬 빨랐다. 비오에스를 새 아키텍쳐로 이주시키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고, 비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작업을 시작하였다. 초기 베타에는 독이 있었지만 넥스트스텝과는 달랐다. 나중에 독은 데스크바로 교체되었는데, 데스크바는 윈도우즈의 태스크바와 비슷한 위젯이다. 개발자용 베타는 1994년 초에 나올 준비가 되었고, 새 컴퓨터는 호의적인 언론 반응을 얻어냈다. 새로운 비박스(매력적인 파란색과 하얀색 박스)는 IBM의 RS/6000 웍스테이션보다도 빨랐고, 비오에스는 맥오에스처럼 돌아갔다. 그런데 Be에 대한 그의 초기 투자 자금은 거의 다 사라져가고 있었고, 가세는 벤쳐 자본가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비는 아직 운영체제를 대규모 시연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세는 Agenda95 엑스포를 최적의 장소로 정하였다. 사코만은 여덟 개의 MPEG 파일을 프레임 저하 없이 한 번에 디코딩시키는 시연을 해보였다. 믿을 수 없는 기능이었다. 당시 다른 개인용 컴퓨터들은 하나의 MPEG 파일을 저화질로 돌리려 해도 추가적인 디코딩 하드웨어를 필요로 했었다. 또한 비오에스 애플리케이션들이 서로 커뮤니케이팅하는 방식 시연과 함께 3D 시연도 있었다. 이 데모는 굉장한 반향을 모았다. 컴퓨터 엑스포로서는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가세는 새 투자 자금 수백 만 달러를 벌 수 있었다. 비가 참가한 다음 쇼는 바로 애플의 1996년 세계개발자컨퍼런스(WWDC)였다. 하지만 WWDC 한 달 전에 애플은 비에게 참가 불가를 통보하였다. 맥용 제품을 제공하지 않아서라는 이유였다. 가세는 여기에 실망하여 비오에스를 파워맥용으로 포팅시켰다. 이때문에 비는 WWDC에 참가도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제까지 불가능했던 수많은 소비자들에게 비를 소개시킬 수도 있었다. 비는 Power Computing으로부터 장비를 대여하여 그쪽 하드웨어용으로서도 수 일 내에 비오에스를 포팅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비는 WWDC의 주인공이었다. (심지어 애플 코플랜드 시연보다도 더 인기가 좋았다.) 애플 경영진들은 코플랜드의 부족함을 고통스럽게 깨닫고 있었다. 애플의 CEO, 아멜리오(Gil Amelio)는 후에 코플랜드를 “모두 각다른 팀들이 해 놓은 개별 조각들 모임...“이라 평했었다. 앞으로 나올 마이크로소프트의 소비자용 윈도우즈 NT(카이로)에 맞서기 위해, 애플은 나이 먹은 기존의 맥 오에스를 대체할 새 운영체제 쇼핑을 시작하였다. 한 때, 아멜리오는 솔라리스나 윈도우즈 NT와 같은 운영체제 라이센스도 고려했었다. 그러나 그 비용이 너무나 높았다. 따라서 애플은 운영체제를 바로 인수하기로 결정내렸다. 이에 언론들은 애플이 비를 인수하리라는 루머를 보도하였다. 그러나 애플은 마지막 순간 차세대 맥 오에스로 넥스트의 오픈스텝을 선택하여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 비는 상당히 실망했지만 곧 Be를 다시 전진하였다. 비는 비오에스를 파워맥에서 철수시키기로 결정내렸고(비박스도 중단시키기로 하였다), x86 플랫폼으로 이주하였다. 비는 비오에스가 윈도우즈의 부가적인 운영체제로 팔리기를 고대하였다. 가령 인터넷과 오피스는 윈도우즈에서 사용하고 멀티미디어 파일 편집은 비오에스에서 하는 식이었다. 이에 따라 비는 대기업(델 등)에 다가섰지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압력때문에 이들은 비오에스 번들을 모두 거절하였다. 실망한 가세는 회사가 부도나기 전에 비오에스용 새 틈새시장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인터넷 기기는 마지막 유행이었다.비는 여기에 운을 걸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런 기기는 가세가 애플에서 취소시켰던 기기들이었다.) BeIA라 불린 이 기기는 특별한 버전의 오페라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리뷰는 좋게 받았어도 판매량은 최악이었다. 비의 최대 하드웨어 제공업체인 소니도 하드웨어 가격의 보조를 중단시켰다. Be Palmed Off 불공정 거래로 마이크로소프트를 재소도 했지만, 비는 이제 희망 없는 회사가 되었고 결국 부도를 선언하였다. PalmSource(1999년 3Com으로부터 분사 이래로 가세가 이사진이었다)가 비의 자산을 매입하였고 가세는 이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부도 과정중 대 마이크로소프트 재판에서 비가 승리하였고, 비는 수 억 달러를 받게 된다. 그리고 비오에스는 차세대 PalmOS인 코발트(Cobalt)의 기반이 되기로 한다. PalmSource의 CEO가 퇴진하자, 가세는 PalmSource의 임시 CEO가 된다. http://lowendmac.com/orchard/05/06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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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Q casaubon 님께서 2006-08-25 05:04 AM 에 수정하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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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3-25, 08:23 PM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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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루이 가세, 아직 살아 있었다
Jean-Louis Gassée Returns from Obscurity… to Talk About MobileMeAugust 13th, 2008 | History, Markets, Mobiles, Software, Tech, iPod & iPhone, the Media![]() Daniel Eran Dilger MobileMe가 애플티비보다도 더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수 십억 달러를 벌지도 않는 애플 제품이 MobileMe이다. 그런데 MobileMe의 깔끔하지만은 않은 출시를 두고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한 비판가들 대열 속에 쟝 루이 가세(Jean Louis Gassée)가 끼어 있었다. 아니, 누구라고? 그렇다. 바로 가세다. The Infamous JLG. 80년대 초반, 가세는 애플 프랑스의 관리자였다. 당시 존 스컬리는, 스티브 워즈니악과 잡스가 같이 1976년에 세운 회사의 통제권 경쟁에서 승리하였고, 1985년, 스티브 잡스의 자리를 가세로 교체하였다. 스컬리와 가세는 80년대 중반, 대단히 성공적이었던 애플 제국을 넘겨받았다. 마케터 중의 마케터 잡스와 엔지니어 천재인 워즈니악이라는 두 인물이 세운 이상적인 회사가 애플이었다. 그러한 애플을 스컬리와 가세는 10년동안 완전히 말아먹는다. 90년대 초반 애플이 저질렀던 실수 중 다수는 스스로가 "저는 정말 형편 없는 경영자였어요"라 말하는 스컬리 탓이랄 수 있지만, 가세도 그런 재앙에 단단히 한 몫 하였다. 매킨토시를 "매킨토시 오피스"로, 기업시장에 마케팅시키려는 잡스의 마케팅을 "맥 오리피스(orifice: 구멍)"이라 비웃은 이도 가세였다. 가세는 또한 애플의 틈새 시장을 벗어나기 위해 다른 협력업체들과 파트너쉽을 맺거나, 애플 기술의 라이센스도 거부하였다. The Gassée Way: High Prices, Low Innovation. 스컬리는 500달러의 마케팅 세금을 붙여서, 오리지날 매킨토시에 1,995달러의 가격을 붙여 놓았다. 원래는 잡스와 엔지니어들이 설정해 놓은 최저가격이긴 하였다. 여기에 가세는 "최고(insanely great)"의 기술을 대중시장에 제시한다는 잡스의 비전을, 이미 애플이 이뤄놓은 지적재산권으로부터 편안하게 이윤이나 뽑아낸다는 비전으로 바꾸어 놓았다. 1986년과 1990년 사이, 잡스는 독립적으로 넥스트를 창립, 유닉스 기반의 높은 퍼포먼스를 가진 웍스테이션을 만든다. 넥스트는 진보적인 개발 프레임웍과 혁신적인 하드웨어 기능을 갖추었다. 반면 가세의 지휘 하에 있던 애플 매킨토시 그룹은 똑같은 옛 기술을 업데이트만 시켰고, 넥스트가 제시하는 가격보다도 더 높은 가격을 받고 팔았다! 가세는 1990년에 애플을 나와 잡스처럼 자기만의 회사를 설립한다. 그 때 애플에서 나오는 살 만한 가격의 맥은 맥 클래식밖에 없었다. 5년 전에 나온 맥 플러스를 재활용한 버전에 불과한 기종이 맥 클래식이었다. 맥 IIfx는 12,000달러의 하이엔드급 웍스테이션 가격으로 팔렸지만, 80년대 초에 개발한 클래식 맥오에스에 030 프로세서를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넥스트는 이미 040칩을 장착한 넥스트큐브를 더 싸게 팔고 있었고, 인텔 i860의 넥스트디멘전 보드(32-비트 포스트스크립트 컬러와 비디오 샘플링을 위한 보드였다)를 선택사양으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넥스트에 저가형 머신이 없었던 이유는 스컬리의 애플이 넥스트를 고소하여, 넥스트가 소비자시장에 진입하여 애플과 경쟁을 벌일 수 없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1990-1995: 게으른 공룡은 멸종한다 1990-1995: NeXT와 Be, 그리고 Mac PC 2008년의 iPhone은 3G 뉴튼일까? Byte’s original NeXT review Gassée’s Plan Be. 애플을 말아먹으며,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가게 만든 뒤, 가세는 애플을 떠나 비(Be)를 창립한다. 비는 별난 하드웨어에서 취미용으로나 돌릴 멋진 외양의 운영체제를 개발한다. 비는 당시 애플의 PowerPC 아키텍쳐를 복제하였고, 그 후 표준 인텔칩 기반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비는 자사 운영체제의 초기 개발자 프리뷰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몇 가지 새로운 아이디어는 제시하였으나, 기본적인 인쇄 아키텍쳐도 없었고, 다중 사용자 보안 모델도 제공하지 않았다. 당시 넥스트는 훨씬 우월한 운영체제였고, 훨씬 더 빠른 시간에 개발 프레임웍까지 갖추어 놓은 상태였다. 또한 PowerPC와 몇 가지 다른 아키텍쳐, 그리고 인텔로의 이주도 해 놓았다. 그러나 당시 스컬리-가세의 80년대 후반 치세는 컴퓨터 업계에 기회주의적이고 악랄한 기운을 허용하고 말았다. 호주의 토끼 범람이나 짐 헨슨(Jim Henson)의 '살을 먹는 박테리아(flesh-eating-bacteria)' 연쇄상구균 전염과 마찬가지다. 영혼이 없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PC의 범람은 개인용 컴퓨터의 창조성과 잠재성을 뒤엎어 파괴시켜버렸다. PC 세계에서 혁신이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어 보였다. 마이크로소프트에게 애플과 관련된 지적재산권 대부분을 무료로 라이센스 줘버린 스컬리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탓이다. 게다가 가세는 애플을 절대로 개방시키지 않았다. Apollo와 함께 맥오에스 인터페이스를 갖춘 유닉스 웍스테이션 개발을 시작한 사람이 가세이기는 하지만, AT&T의 맥 휴먼인터페이스 라이센스를 물리친 이도 가세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윈도 독점을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 스컬리와 가세의 무능함은 플랫폼 확산에 대한 빌 게이츠의 제안을 무시할 정도였다.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가 독점화를 이룬다. ![]() 애플 서버 20년사 Undoing the Sculley-Gassée Crisis. 1996년 마지막 나날들, 옛 애플은 잡스의 넥스트 운영체제가 훨씬 더 우월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 가세의 BeOS 인수를 짧게나마 고려했었다. 넥스트는 이미 기업시장에서 증명이 되어 있었으며, 본질적인 이식성덕분에 PowerPC MacOS 시스템 포팅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넥스트를 인수한 뒤, 애플은 맥오에스텐을 주류용 운영체제로 출시하기까지 6년을 더 소요하였고, 넥스트 기술을 기반으로 한 맥 플랫폼의 새로운 중요성을 언론이 깨닫기까지는 또 다른 6년이 더 필요했다. 전체 컴퓨터 업계가 4% 남짓의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대다수 업체들이 적자를 보는 가운데, 애플의 맥은 이제 연대비 40%의 성장률과 이익을 보이고 있다. 애플은 셋톱박스로서 애플티비, 새로운 휴대용 플랫폼으로서 아이폰과 아이포드 터치까지 선보였다. 가세의 비는 Palm이 인수하였고, 현재 사라졌다. 가세는 현재 벤처캐피탈인 Allegis Capital의 파트너로 있다. 컴퓨터 업계를 말아먹고 났으니, 이제 가세는 남은 인생을 조용하게 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MobileMe를 투덜거림으로써 다시금 나타났다. 그의 기업 이야기를 쓰는(어쩌면 남이 써 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블로그에 매우 길다란, 흥미로운 주장을 한 것이다. ![]() 애플은 과연 마이크로소프트를 데스크톱 전쟁에서 이길수 있나 90년대 OS의 역사 Yellow Box의 죽음, 그리고 Cocoa Patting the Back Once Stabbed. MobileMe에 대한 가세의 블로그 글을 보면, 필자의 글이 짧게 느껴질 정도다. 그는 일단 생각부터 한다. "의심이 남아 있다: 수 천만 명 분의 무선 데이터 싱크 서비스를 과연 애플이 전세계적으로 해 줄 수 있을까?" 그 다음, 아무 것도 아닌 것 갖고 관계 없는 글을 계속 쓴 가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애플은 각 맥 사용자들에게 매월 100~200메가 바이트의 [맥오에스텐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푸시'한다. 지난 주 아이폰 2.0.1 업데이트가 나왔고, 나는 아이폰 두 대를 수 분만에 업데이트할 수 있었다. 별 탈 없이 200메가 바이트 파일을 다운로드받았는데, 여기에 대한 불만은 못 들어보았다. 아이튠스도 수 십억 곡을 판매하였고, 매일 수 천만 명을 상대하며, 매우 예외적인 경우를 빼고는 모두 잘 돌아간다. 한 마디로, 애플 시스템은 규모성이 참 좋다는 얘기다." "지난 주, Gmail 서비스가 15시간 정도 다운된 적이 있다. 지난 달, 아마존의 웹서비스 또한 다운이 됐었다. 그리고 지난 해, RIM 서버 또한 반나절 정도 다운되어서 월스트리트 투자은행가와 컨설턴트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최고의 기업들조차 다운될 때가 있다는 말이다." "오늘의 주제인 MobileMe으로 돌아가보자. 블랙베리의 부드러운 싱크를 경험해보지 못했다면야 MobileMe를 좋아할 것이다. 잘 돌아간다. 설정이 쉽고 아이폰만 있으면 간단하다. 무선 싱크를 광고한대로 해 준다. 그런데 이 서비스가 21개 국가(8월 22일부터는 43개 국가이다)에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겠다." 가세의 마지막 세 문단만 봐줄만 하고 기민하게 쓰여져 있다. 그가 그 문단들만 따로 쓰지 않았음이 애석할 따름이다. 독자들 대부분은 마지막 문단을 쳐다도 안 볼 것이다. Launchpad Chicken: MobileMe and Sync Trouble | Monday Note Faith in Jobs Means Forgiving JLG. 잡스의 기적적인 기업부활력 덕택에 애플은 이제 다시금 지도자적 위치로 돌아왔다. 우리를 누가 죽였는지, 누가 윈도만 남겨 놓았는지 잊어도 될 때이다. 하지만 지난 15년간 악성 소프트웨어나 바이러스, 스파이웨어, 광고나 뿌리는 3류급 플랫폼의 지배를 받아온 점은 참으로유감이다. 초기 애플 엔지니어들이 이룬 것처럼 기품 있으면서 일관성 있는, 매력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지배가 아니었다. 물론 과거는 과거다. 쟝-루이 가세 당신때문에 필자도 젊은 시절 대부분을 윈도 지원 일이나 했을지도 모르겠다. 현재 애플이 누리는 달콤함도 윈도라는 무혁신의 폐해 속에 있어야 감사하기 더 쉬울 테지만 그렇게 상황을 만든 것은 당신이었다. 그 죄만은 용서는 해도, 감사할 수 없다. 이 자리에서 필자가 그런 역사를 이따금씩 쓰긴 하겠지만, 역사적인 흥미때문이지 개인적인 감정은 아니다. Did you like this article? Let me know. Comment here, in the Forum, or email me with your ideas. Like reading RoughlyDrafted? Share articles with your friends, link from your blog, and subscribe to my podcast (oh wait, I have to fix that first). It’s also cool to submit my articles to Digg, Reddit, or Slashdot where more people will see them. Consider making a small donation supporting this site. Thanks! Jean-Louis Gassée Returns from Obscurity… to Talk About Mobile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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