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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8, 12:25 AM   #1
casaub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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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iPhone은 3G 뉴튼일까?

Newton Rising: Is the Next iPhone Device a G3 MessagePad?

December 27th, 2007 | Markets, Software, Tech, the Media

Daniel Eran Dilger

애플이 뉴튼 메신저패드를 부활시킨다는 루머는 언제나 인기만점이었다. 공식적으로 죽은지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휴대폰과 아이포드, 혁신적인 인터넷 기기"의 총합이라 소개했을 때, 이 루머는 또 다시 절정에 달하였다. 처음에 아이폰은 잡스식 뉴튼처럼 보였지만, 후에 나온 아이포드 터치는 애플의 계획이 보다 넓은 목표 소비자층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또한 타블렛형기기가 새로이 나오리라는 루머도 여기에 해당된다. 애플의 과거를 통해 미래를 알아보는 것은 어떨까?

Jobs: the Anti-Newton?
80년대 말, 당시 애플 CEO인 존 스컬리의 비전이 뉴튼이었다. 즉, 자기의 비전이 아니라는 이유로 잡스가 뉴튼을 언제나 증오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때문에 1997년, 잡스가 애플에 복귀하자마자 뉴튼부터 사라졌다는 설명이다. 물론 진짜 이유는 훨씬 더 복잡하다.

80년대 중순, 잡스와 스컬리는 애플의 미래를 두고 격돌한다. 잡스는 언제나 차세대를 이끌 선도적인 제품을 추구했었다. 애플 II가 보다 그럴듯한(more established) 기업들로부터(특히 IBM) 도전을 받자, 애플은 급하게 애플 III를 선보였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대단한 재앙이었다. 애플도 애플 II 모델을 새로 선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와 동시에 애플의 장기 계획은 이전까지 기술 데모 수준이었던 개념을 주류 데스크톱 컴퓨팅으로 이끌어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애플은 Lisa 프로젝트에 수 천만 달러를 투자한 뒤, 애플 III를 내놓은지 2년만에, 기업체가 사용할 만한 첫 번째 그래픽 데스크톱 컴퓨터를 등장시킨다.

그 다음 목표는 이 기술 개념을 일반 소비자급으로 끌어 내리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위해 잡스는 매킨토시 프로젝트로 뛰어든다. 원래 매킨토시 프로젝트는 Lisa 개발과 같이 진행중이었다. 사실 첫 등장은 떠들썩했지만, 매킨토시 판매량이 애플의 기대량은 못맞췄었다. 잡스는 맥 판매량을 끌어 올리기 위해, 기업시장으로의 확장을 추구하였다. 잡스의 Macintosh Office 전략은 공유파일 서비스와 출력 서비스, 그리고 네트웍 웍스테이션으로서의 새로운 매킨토시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보다 보수적인 스컬리는 맥의 잠재성을 알아보지 않고, 그 대신 애플 II 라인을 더 중시하였다. 당시 애플 II는 여전히 흑자를 안겨다주고 있었다. 맥이 첫 등장했을 때 스컬리는 애플 IIc를 소개하였고, "Apple II Forever!"라 천명하였다. 애플 II 구입자들에게는 감명을 주는 말이었지만, 미래의 진보로서 의미는 전혀 없었다. 스컬리는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잡스를 애플에서 축출하였다. 1986년, 잡스는 애플을 떠나 새로이 맥 다음의 선도적인 제품을 선보일 회사를 창립한다. 그리고 매킨토시 오피스 전략을 그 회사에서 추구하려한다.

스컬리는 잡스의 자리에 쟝-루이 가세를 앉힌다. 가세는 스컬리의 보수적인 식견을 공유하였고, 맥을 고급 PC로 자리매김시켰다. 즉, 하이엔드는 맥, 로 엔드는 애플 II였다. 이 때문에 애플은 애플 II를 90년대까지 판매를 계속하였다. 가세는 잡스의 매킨토시 오피스 전략이 Mac Oraface라 조롱하였지만, 맥 판매가 늘기 시작한 때는, 사무용 수단으로서 데스크톱 출판이 시작한 뒤였다. 레이저라이터(LaserWriter)가 그 주력을 맡았다. 애플이 투자한 신기술용으로 실용적인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것이 매킨토시 오피스 전략의 골자였다.


애플 서버 20년사


Enter the Newton.
Lisa와 매킨토시 정신을 가진 기술을 애플은 계속 진보시켰다. 스컬리가 추구한 개념인 Knowledge Navigator에 이 기술이 많이 녹아들어가 있다. 애플 엔지니어들도 필요한 기술 개발을 이뤄가고 있었다. 하지만 스컬리가 제안한 실용적인 애플리케이션으로 볼 때, 이 플랫폼은 초점도 없었고 제한적이었다.

스컬리는 진보적 이상이 아니라, 보수적 두려움에 따른 제품을 추구하였다. 그는 새 플랫폼 기능이 너무나 많아서, 새 플랫폼이 1990년에 급속도로 늘어난 매킨토시 판매량을 잠식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당시 매킨토시 라인은 자체적으로 흑자를 내어가고 있었다. 잡스가 떠난 뒤, 애플은 애플 II에서 맥으로의 이주를 하게 되었는데, 이 이주는 단행이 아니라 수용에 가까웠다. 그리고 90년대 스컬리는 똑같은 실수를 다시 저지르려 하고 있었다.

뉴튼이라 불린 이 개념은 원래 타블렛형 컴퓨터와 휴대용 커뮤니케이터 외에 데스크톱 멀티미디어 시스템까지도 추구한 제품으로서, 여러 가지 프로토타입이 나왔다. 1992년, 이 개념은 다중의 목표를 가진 휴대용 기기로서 책 크기로 줄어들었다. 스컬리는 1992년 1월, 라스베가스의 소비자가전쇼(CES)에서 초기 프로토타입을 데모하였고, 이를 PDA(Personal Digital Assistant)라 불렀다.

그로부터 실제 뉴튼이 나오기까지는 2년이 더 걸렸다. 후에 Palm을 창립하게 되는 호킨스(Jeff Hawkins)는 Casio Zoomer라 불리는 뉴튼-식의 제품을 개발하였고, 1993년 700달러의 가격표로 출시시킨다. 뉴튼이 약속한 바를 잘 실현시켜주지도 못한 이 제품은 대실패작으로 끝나고만다.

뉴튼 메시지패드가 그 해 가을, 700~900달러의 가격표로 출시된다. 애플 III처럼 뉴튼은 시장을 평정하리라 기대를 모았다. 전 업계가 당시 펜 컴퓨팅과 타블렛 유행에 들떠 있었지만, 실제로 잘 돌아가는 기기를 만든 기업은 아무 곳도 없었다. 뉴튼 역시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그래도 4년의 생존 기간 동안 PDA 시장을 이끈 기기는 뉴튼이었다.


뉴튼의 교훈


The MessagePads.
뉴튼이 어째서 초기에 선도적인 위치를 누렸을까? 큰 이유가 있다. 휴대용 애플리케이션을 위해 Acorn과 함께 디자인한 프로세서덕분이다. ARM이라 불리우는 이 프로세서는 원래 Acorn의 RISC Machine용이었다. 효율적이고 빠른 ARM 덕분에 뉴튼은 다른 일반적인 부품으로 만든 시스템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원래 애플은, PenPoint를 돌리는 EO 오거나이저에 들어가 있는 AT&T의 Hobbit 프로세서를 쓸 예정이었다. 하지만 ARM 파트너쉽의 결과가 너무나 훌륭했다. 가세는 나중에 이 Hobbit 프로세서를 BeBox 제작에 활용한다. 후에 BeBox는 PowerPC로 이주한다.

이와 동시에 애플은 휴대용 컴퓨터 기술을 개척하고 있었다. 1991년에 나온 새로운 파워북은 소니와의 협력으로 만들어진 디자인이었다. 파워북은 화면 가까이에 키보드를 장착한 현대적인 디자인을 첫 소개하였고, 키보드 아래에 손목대를 놓았다. 원래 80년대 전통적인 노트북 디자인은 키보드가 아래쪽에 위치해 있었다. 90년대 초, 애플의 맥 시장 점유율은 전세계 PC 시장의 10%에 가까웠다. 덕분에 애플은 최고의 디자인으로 혁신적인 하드웨어 개발을 지속시킬 수 있었다.

하드웨어와 프로세서 개발의 경험뿐만이 아니었다. 애플은 또한 매킨토시 상에서 혁신적인 인터페이스 기술 개발에 수 백만 달러를 투자한다. 덕분에 뉴튼 메시지패드는 애플의 최신, 최고의 기술을 믿을 수 없으리만치 지니게 되었다. 불행히도 온갖 엔지니어링과 디자인이 뉴튼에 들어갔지만, 뉴튼의 목표는 분명하지가 못했다. 보건과 운송, 그 외 업계가 휴대용 기기 안에 주문형 데이터 관리를 필요로 하였지만, 이들은 틈새 시장이었다. 이 시장의 규모만으로는 적절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유지에 부족했다. 휴대용 기기 팬들을 제외하면, 주류 소비자들은 이런 기기에 700달러의 가치를 매기지 않았다.


iPhone은 어째서 Symbian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Newton and the Fall of Apple.
90년대 초 뉴튼은 80년대 초의 맥과 매우 유사했다. 훌륭한 제품 소개, 하지만 고도로 특화된 시장 외에는 분명히 팔릴 만한 소프트웨어가 없었고, 열광적인 팬들에 의존한 제품이었다. 한 번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하자, 애플은 다른 영역에서 점차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맥 기술을, 작지만 이윤이 남는 출판과 디자인 시장에 주로 맞추자는 스컬리의 고집은 애플의 잠재성을 제약시켰다. 또한 1985년, 그가 마이크로소프트에게 매킨토시 기술을 넘겨주기로 한 계약때문에, 애플은 마이크로소프트 복사머신(copycat)의 도전을 받았다. 싸구려 PC 하드웨어에서 돌아가는 더 비싼 윈도 소프트웨어의 도전이었다.

스컬리는 정치인으로 나서면서 점차 애플을 무시하였고, 마침내 뉴튼이 출하되기 직전, 사임을 요구받는다. 당시 애플은 비전 없는 CEO들때문에 중구난방이었다. 언론은 1985년부터 1995년 사이가 애플이 전성기인양 묘사하였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 때, 애플은 NeXT를 인수했고, 1997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 복귀한다. 하지만 분명한 시장도 없었고, 그런 시장을 일굴 만한 제품도 없었다. 잡스는 회사를 복귀시키기 위해 무자비하게 정리를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뉴튼이 그 첫 번째 정리 대상은 아니었다.

애플 소생시키기

Ameliorating the Newton Crisis.
1997년, 잡스와 당시 CEO, 아멜리오는 뉴튼을 서로 다르게 간주했다. 넥스트를 인수하면서, 아멜리오는 뉴튼을 별도의 회사로 분리시켜서, 이 회사가 다른 업체에게 뉴튼 기술을 라이센스시킨다는 생각이었다. 모토로라 등이 벌써 참여하여, 뉴튼 기술에 기반한 무선 Marco와 같은 기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처음, 잡스는 뉴튼의 잠재성을 고려했었다. 하지만 애플 안에서의 뉴튼이었다. 1997년 중반, 이사진이 아멜리오를 끌어내리고 잡스를 앉혔을 때, 잡스는 뉴튼을 곧바로 다시 애플 안으로 불러들였다. 10년 전, 스컬리가 만든 사소한 물건을 잡스가 의도적으로 없애버리려는 시도 아닌가 하는 관측이 생겨났다. 즉, 크린즐리(Cringely)-스타일의 과장 드라마가 여기저기서 나왔다는 의미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 우선 잡스가 공격하지 않은 스컬리의 결정사항이 아주 많았다. PowerPC로의 이주가 대표적이다. 잡스는 애플에서만 PowerPC를 지원한 것도 아니었다. 상황이 불가능해질 때까지, 넥스트의 다음 프로세서 아키텍쳐로서도 PowerPC를 계획하고 있었다. 스컬리가 관여했다고 해서 무조건 다 없애버리겠다는 식이었다면, 매킨토시에 대해서도 다른 결정을 내렸을 것이 분명하다.

  • 또 다른 사례가 ARM이다. ARM 역시 스컬리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Acorn과 함께 개발한 휴대용 프로세서였다. 스컬리가 싫어서 1998년 뉴튼을 죽여버렸다면, 2년 뒤, 어째서 ARM으로 아이포드를 만들었을까?

  • QuickTime은 어떨까? 퀵타임은 잡스가 애플을 떠난 뒤에 나온 기술이다. 잡스는 넥스트에서도 스컬리의 애플이 만든 기술과 호환되는 프레임웍, NeXTime을 마련하였다. 또한 애플로 복귀한 후, 잡스는 퀵타임을 애플이 가진 핵심 자산으로 내세웠다.

  • Ink도 있다. 뉴튼 2.0용으로 개발된 훌륭한 필기인식 기술의 소프트웨어 버전이 잉크다. 스컬리가 싫다는 감정적인 이유를 내세웠다면, 잡스는 어째서 맥오에스텐에서 잉크를 되살리고, 하나의 기능으로서 내세우기까지 하였을까?

사례는 그 외에도 많다. 잡스는 스컬리의 PDA를 묻어버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뉴튼의 가치를 모조리 다 구해내려 노력했었다. 처음에는 분명 그냥 놓아두자는 계획이었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애플은 약간의 퍼포먼스 올리기와, 프린트 recognizer와 관련된 초기 문제점을 고친 중요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말고는 거의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았다. 오히려 1997년 초, 아멜리오는 새로운 뉴튼을 선보인다.

  • MessagePad 2000: 훨씬 더 빠른 StringARM 프로세서와 네트워킹 지원, 더 많은 RAM, 480×320 그레이스케일이라는 더 높은 해상도를 갖췄다.
  • eMate 300: 교육용으로서 저가형 미니 랩톱 뉴튼이었다.

몇 달 후, 뉴튼을 다시 애플 내부로 끌어들인 후, 잡스는 사적인 이메일에서 뉴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알려졌다. "eMate의 미래는 밝다. 현재 메시지패드 판매량도 괜찮다.[...] 애플로 불러들였으니, 더 많은 판매자원과 마케팅을 펼칠 수 있다. 별도의 작은 회사로 놓아두는 것보다 낫다. 걱정마라."

한 달 뒤, 애플은 새로이 Newton MessagePad 2100과 함께, 새롭고 간소화된 라인을 선보인다. G3 파워북과 파워맥, 그리고 이 때 새로이 온라인 웹스토어가 나타났다. 잡스가 이 때 뉴튼을 죽이기로 마음 먹었다면, 구태여 새 모델을 이 때 선보일 것도 없었을 것이다. 뉴튼이 취소된 때는 그로부터 6개월 뒤였다. 그저 뉴튼 팬들의 가슴을 찢기 위해 신모델까지 선보였을까, 아니면 사업 현실이 관여했을까?


어처구니 없는 Palm의 실수연발


Why Jobs Killed the Newton.
애플이 뉴튼을 죽일 만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제일 분명한 이유는 애플이 가진 돈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으며, 재무적으로 어려웠다는 점이다. 1996년 애플은 아멜리오 하에서 8억 1600만 달러 손실을 본다. 1997년도 애플은 10억 달러 손실이었다. (물론 6억 6700만 달러는 넥스트 인수관련 대금이었다.) 다시 흑자로 돌아서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던 때였다.

애플의 기업 이미지 또한 빛이 바랬다. 애플은 손실을 보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빠르게 그 두뇌도 잃고 있었다. 능력 있는 엔지니어들이 개별 프로젝트나 다른 회사로 빠져나갔고, 전문가들은 애플의 미래에 거의 희망이 없다 거론하였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전문가들이 빠져나간 채, 애플에는 비틀거리는 판매조직과 문제 있는 제조와 유통, 늙어가는 소프트웨어플랫폼, 안팔리는 하드웨어와 부품 재고, 기술 업계 모두에게 "밟고 지나가쇼"하는 낙인만이 남았다.

게다가 맥과 뉴튼 클론 프로그램도 남아 있었다. 뉴튼 라이센스 약정이 재앙적으로 잘못 인도된 맥 라이센스 계약과 유사하다면, 계속 피를 빨리느니, 차라리 그만 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More Reasons Why Jobs Killed the Newton.
뉴튼만이 가진 문제점도 있었다. 뉴튼 디자인은 현실성과 괴리된 상아탑 디자인이다. 독특한 방식의 뉴튼 기술은 비밀스러웠고, 이 때문에 개발자들의 접근이 어려웠다. 끝까지 완성이 안 된 기술도 많았다. 특히 뉴튼의 데스크톱 싱크 프로그램은 결코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노트북 교체가 아닌, PC의 보완제품을 노린 기기로서 심각한 오류였다.

1998년, 5년 묵은 뉴튼OS는 중대한 개정이 필요했다. 그대로 유지하려면, 뉴튼 라이센스 업체와 여러 고객들이 발견하는 문제를 계속 지원해야 했다. 그렇다고 뉴튼을 대량 판매하고 있지도 못하였으며, 라이센스 약정으로는 개선을 위한 신규투자를 지원할 수 없었다. 90년대 초, 옛날 기술의 문제 또한 뉴튼의 미래 개발의 발목을 끌어당겼다. 애플은 New World USB iMac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작업중이었다. 대량 판매를 위해, 이런 정도의 개선작업을 하는 것은 별로 합리적이지 않았다.

또 있다. 뉴튼 프로세서 하드웨어가 Digital의 StrongARM에 묶여 있었고, 인텔이 Digital을 1997년 하반기에 인수한다. 인텔은 애플을 경쟁자로 간주하였고, 애플과 뉴튼을 위한 StrongARM 로드맵을 선보일 이유가 없었다. 애플도 다른 프로세서용 뉴튼 디자인을 할 여력이 없었다. 90년대 초 만들어진 뉴튼 OS 또한 개정 작업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웠다.

Even More Reasons Why Jobs Killed the Newton.
뉴튼 미래의 가장 큰 문제는 Palm이기도 하다. 1998년 당시 Palm은 300달러 짜리 오거나이저를 대량판매하였다. eMate는 800달러였고 메시지패드가 1100달러 하던 시대였다. 애플이 경쟁을 하려면 뉴튼을 유용한 뉴튼으로 유지시키면서 가격을 대폭 하락시켜야 했다. Palm Pilot에 대한 대안으로서 완전히 재디자인해야 했다는 이야기다.

Palm과 싸우는 대신, 1998년 애플은 Palm과 협력하여 Claris Organizer를 Mac Palm Desktop 소프트웨어로 판매한다. 또한 호킨스의 Handspring이 예전 시리얼 포트가 아닌, USB를 통해 새 아이맥과 직접 연결될 수 있도록 하였다. Handspring이 자사 하드웨어에 아이맥의 투명색상을 따라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Palm과의 협력은, 애플로서 훌륭한 결정이었다. 90년대 하반기, Palm은 닷컴 거품의 선도주자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거품 폭발로 인해 PDA는 비싼 장난감이 되어버린다. 거품 폭발로 인해, 오히려 마이크로소프트가 크게 피해를 입게 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Palm의 성공을 보고, WinCE/Palm-크기의 PC/Pocket PC를 내세웠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WinCE에 수 십억 달러를 투자하였지만 아무 것도 얻지 못하였다. 애플이 동일한 경로를 따라했다면 막대한 자원 손실을 볼 뻔 했었다. 게다가 애플은 손실을 보충해 줄 마이크로소프트식 이윤 마진도 갖지 못하였다.


WinCE와 Windows Mobile의 처절한 실패사


Newton's Children.
기존 Palm의 성공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고, 애플은 차세대 제품을 목표로 하였다. 2001년에 나온 디지탈 뮤직이다.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는 음악 재생을 자사 라이센스 플레이어로 제한시키는 DRM을 구축하느라 서로 경쟁했었다. 애플은 자사의 모바일 엔지니어링과 소프트웨어, 기기 개발 경험을 살려서, 대용량에 빠르고 쉬운 싱크, 긴 재생시간, 기존의 음악포맷과 호환성을 갖춘 뮤직플레이어를 만든다.

애플의 "DRM이 선택을 제한시킨다"면서, 음악 업계를 독점화시킨다는 주장은, 아이포드가 DRM을 선택적으로 지원할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 WMA와 소니 ATRAC 포맷이 MPEG MP3를 없애버리려 노력했었다는 사실을 편리하게 잊은 주장에 불과하다. 어쩌면 비참한 실패 이전, 윈도 미디어에 대한 숨가쁜 칭송이 부끄러워서일지도 모르겠다.

뉴튼은 애플의 핵심 자산을 소모시켰었다. 하지만 아이포드는 애플의 기업이미지를 쇄신시키는 한편, 대상 고객층을 넓히고 애플의 소매전략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모두가 애플의 기반을 튼튼히 만들었다. 2001년 무엇에라도 전쟁을 선포한 부시 행정부를 뒤엎은 경기침체, 그리고 무기와 화석연료 사업에 대한 과다투자, 경찰 국가 파시즘과 관련된 유류할증료(transportation surcharges) 인상 속에서도 아이포드는 맥 판매 증가를 도왔다. 세상은 그저 rip, mix, burn을 원했고, 애플 아이포드는 최고의 수단이었다.


누가 iTunes를 죽일까?


The iPhone and Beyond.
곧 애플은 대중시장을 향한 새로운 휴대용 기기를 만들던 그간의 실력을 발휘한다. 그것이 아이폰이다. 애플은 또한 강력한 소매점 전략을 활용하여 아이폰과 아이포드, 맥 제품의 판매를 모두 증가시킨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iPod Slate. 키보드 없는 랩톱으로서, 스타일러스 펜을 사용하는 빌 게이츠 방식의 노트북에 대한 전문가들의 희망은 끝이 없다. 하지만 오히려 아이포드 터치를 대형화시킨 오락용 타블렛이 더 소비자들의 주목을 끌 것이다. 루머로 나도는 울트라 포터블의 부품과 디자인을 공유하면서 대량으로 판매를 해야 가격이 더 떨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기존 모델보다 더 저렴한 터치를 바랄 수는 없겠다. 7" 터치스크린이라면 600달러 정도로 맞출 수 있다. 비용을 맞추기 위해 월별 통신료를 아이폰 식으로 부가시킨다면 더 줄어들 수도 있겠다.

아이튠스 곡 구매와 주문형 비디오 시청, 스타벅스 iTunes WiFi Store를 통한 데이터 서비스, 봉주르를 활용한 아이튠스 라이브러리와 아이포토 앨범 스트리밍(애플티비와 같다) 기능.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액자로 활용할 수 있고, 블루투쓰 키보드를 갖춘다면, iPod Slate는 스타일러스 없는 초각막, 컬러 뉴튼과 상당히 유사할 것이다.


iPhone 08. 아이폰 하드웨어를 개선시킬 분명한 업그레이드는 아무래도 추가적인 Flash RAM과 UMTS 지원일 것이다. AT&T의 미국 내 UMTS 서비스는 유럽과 일본과는 다른 주파수 대역을 사용한다. 그 주파 영역도 다르다. 3G라는 유행어를 접했다면 일단 미국 내에서 일반적인 EVDO가 먼저 떠오를 테지만, 아이폰의 GSM 경쟁사, Sprint와 Verizon Wireless만이 EVDO를 지원하기 때문에 아이폰이 EVDO를 지원하지는 않을 것이다.이 두 회사는 퀄컴의 CDMA2000에 투자했으며, EVDO는 퀄컴 고유의 3G다.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와 중동의 GSM 시장은 UMTS다. 3G 업그레이드에 대한 WCDMA 표준이 UMTS다. UMTS는 CDMA2000 통신망과 GSM 통신사 간의 협력형 미래를 의도하였지만, 자사의 EVDO를 지원하기 위해 퀄컴이 여기서 발을 뺐다. 그래서 미국은 UMTS와 EVDO로 나뉘어져 있다. CDMA2000 시장은 일본에도 있는데, 일본도 EVDO보다는 UMTS로 이주중이다. Verizon Wireless와 Sprint는 이 사실을 감추려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이들은 3G를 강조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3G 휴대폰 대부분은 너무나 안좋아서 기존의 EDGE 아이폰보다 더 빠르게 웹을 브라우징하지도 못한다. 더 빠른 통신망이라면서도 말이다.

EVDO와 UMTS 모두 신호 디코딩을 위해, 더 강력한 프로세서를 요구한다. 배터리 수명에는 치명적이다. 그래서 아이폰 1세대는 이를 채택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과 유럽에서, 어쩌면 미국/AT&T 버전의 UMTS를 지원할 아이폰 08은 이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1월경, 전문가들은 유럽에서의 판매를 위해서라도 아이폰이 "3G"로 가야한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필자는 애플이 기존의 EDGE 버전을 계속 팔 것이며, 유럽인들도 EDGE-전용 LG Prada 폰을 계속 구입하리라(심지어 이 휴대폰은 WiFi도 안달렸다) 예상했었다. 그들은 필자를 비웃었다. 그들은 이제, EU 내에서 아이폰으로 재미를 못보리라 계속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옳았고, 아이폰도 기대 이상으로 잘 팔리고 있다. 3G 스티커가 없어도 말이다.

애플이 2008년 중/하반기에 앞서서 3G 아이폰을 선보이리라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별 증거가 없다. 설사 그런다 하더라도 3G는 해외에서만 작동할 것이다. 애플이 미국내 AT&T 판매용 3G/UMTS 버전을 해외와 동시판매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고급 소비자들은 업그레이드를 할 것이다. 또한 1세대 아이폰용 중고시장도 크게 활성화될 것이 틀림 없다. 역사상 그 어느 중고 휴대폰보다도 더 비싼 휴대폰으로서 말이다. 3G 루머가 하도 나돌아서, 별로 언급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다.


iPhone을 둘러싼 10 가지 억측
Secret iPhone Details Lost in a Sea of Hype and Hate
iPhone Grabs 27% of US Smartphone Market

2008년에 애플이 무엇을 내놓을지에 대해서는 좀 더 아이디어가 있다. 좋은 생각이 있다면 보내주시라. 최고의 아이디어를 포스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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